프랑수아 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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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카바나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풍자 유머의 선구자이자 언론인이자 작가였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강제 노동 경험을 겪었으며, 자전적 소설을 통해 어린 시절과 전쟁 시기의 경험을 묘사했다. 그는 1960년, 조르주 베르니에와 함께 풍자 잡지 《알라키리》를 창간하여 프랑스 언론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샤를리 엡도》를 창간하여 군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등 사회 비판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의 유머는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졌으며, 작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2014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랑수아 카바나는 에밀리아로마냐주 피아첸차주 베톨라 출신 아버지와 니에브르주 소비니레부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노장쉬르마른의 이탈리아 이민 사회에서 자랐으며, 1978년 자전적 소설 『Les Ritals』(레 리탈; 이탈리아인을 비하하는 말)에서 이민자로서 차별받은 경험을 이야기했다.[4]
프랑수아 카바나는 풍자 주간지 《아라 키리》와 《샤를리 에브도》에 기고한 글,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유머와 풍자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2. 생애
20세에 나치 독일 점령하 강제 노동 징용(STO) 법에 따라 베를린의 무기 제조 공장으로 보내졌다. 1979년 소설 『Les Russkoffs』(레 뤼스코프; 러시아인을 비하하는 말)에는 2년 반 동안의 경험이, 1985년 소설 『Maria』(마리아)에서는 우크라이나 여성 마리아와의 만남이 그려져 있다.[4][5]
1954년 장 노비(Jean Novy)의 월간지 제로(Zéro)에 기고했고, 1960년 "쇼롱 교수" 죠르주 베르니에(Georges Bernier)와 알라키리를 창간했다. 다다이즘 정신을 계승한 이 신문은 프랑스 언론계에 돌풍을 일으켰으나, 검열로 발금 처분을 받았다.[4][6]
1969년 『하라키리 에브도』(Hara-Kiri Hebdo)를 창간했으나, 1970년 샤를 드 골 전 대통령 사망 관련 보도로 발매 금지되었다.[7] 1970년 『샤를리 엡도』를 창간, 『하라키리』의 정신을 계승하고 뷔제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 등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4]
1981년 사회당 집권 후 『샤를리 엡도』는 경영난으로 파산했으나,[8] 10년 후 필립 발(프랑스어 위키백과)의 『샤를리 엡도』에 참여했다.
1980년대 이후 집필에 전념, 레 리탈(Les Ritals)이 성공을 거두었다. 동물 복지, 투우 반대, 생태 운동에 참여했다. 2011년 소설 《Lune de miel|밀월프랑스어》에서 파킨슨병을 공개했고,[10] 2014년 90세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프랑수아 카바나는 에밀리아로마냐주 피아첸차주 베톨라 출신 아버지 루이지 카바나(Luigi Cavanna, 1880-1954)와 니에브르주 소비니레부아 출신 어머니 마르그리트 샬방(Marguerite Charvin, 1890-1976)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노장쉬르마른 (센주, 현재의 발드마른주)의 이탈리아 이민 사회에서 자랐다. 1978년 발표된 자전적 소설 『Les Ritals』(레 리탈; 이탈리아인을 비하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민자로서 차별을 받고 가출하는 등 힘든 경험을 하였지만, 학교를 좋아하고 성적도 좋았으며 특히 읽고 쓰는 것을 잘했다.[4]
2. 2. 제2차 세계 대전
카바나는 20세에 나치 독일 점령하의 강제 노동 징용(STO) 법에 따라 베를린의 무기 제조 공장으로 보내졌다. 1979년에 발표된 『Les Russkoffs』(레 뤼스코프; 러시아인을 비하하는 말)에는 종전까지 2년 반 동안의 기아, 굴욕 등 힘든 경험이 그려져 있다. 1985년에 발표된 세 번째 자전 소설 『Maria』(마리아)에서는 베를린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종전 때 헤어진 후 다시 행방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4][5]
2. 3. 언론 활동
1954년, 장 노비(Jean Novy)가 창간한 월간지 제로(Zéro)에 기고했다. 당시 이 잡지는 "거리 신문 판매원"이 개별적으로 판매했으며, 매대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후에 공동으로 알라키리를 창간하게 된 "쇼롱 교수" 죠르주 베르니에(Georges Bernier)는 이러한 거리 신문 판매원 중 한 명이었다. 1960년 9월 두 사람은 "바보 같고 심술궂은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알라키리 제1호를 발행했다.
다다이즘 정신을 계승하고, 지나치게 "심술궂은", 때로는 지나치게 "블랙 유머"를 특징으로 하는 이 신문은 프랑스 언론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카바나에게 모인 사람들은 이민자·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었으며, 알라키리 활동을 통해 전시 중의 군국주의와 전후의 소비 사회에 철저히 반대하는 태도를 고수했다.[4]
이 무렵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의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시행되고, 검열이 이루어졌다.[6] 그 때문에 알라키리는 창간 10개월 만에 발금 처분을 받았다. 1966년에는 두 번째 발금 처분을 받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 3. 1. 알라키리 창간
1954년 장 노비(Jean Novy)가 창간한 월간지 제로(Zéro)에 기고했다. 당시 이 잡지는 "거리 신문 판매원"이 개별적으로 판매했으며, 매대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후에 공동으로 알라키리를 창간하게 된 "쇼롱 교수" 죠르주 베르니에(Georges Bernier)는 이러한 거리 신문 판매원 중 한 명이었다. 1960년 9월 두 사람은 "바보 같고 심술궂은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알라키리 제1호를 발행했다. 도발적이고 조롱하며 때로는 저속한 풍자 그림을 다수 게재한 이 신문의 목적은 이러한 그림을 통해 허영심 많고 점잖은 체하는 위선자들을 자극하고 사회의 기존 개념을 뒤흔드는 것이었다.[4]
다다이즘 정신을 계승하고, 지나치게 "심술궂은", 때로는 지나치게 "블랙 유머"를 특징으로 하는 이 신문은 프랑스 언론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카바나에게 모인 사람들은 이민자·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재능 있는 롤랑 토포르(Roland Topor), 장-마르크 레제르, 제베(Gébé: Georges Blondeaux), 조르주 왈랑스키, 카뷔 등의 젊은이들이었으며, 그들은 알라키리 활동을 통해 전시 중의 군국주의와 전후의 소비 사회에 철저히 반대하는 태도를 고수했다.[4]
이 무렵 처음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의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시행되고, 검열이 이루어졌다.[6] 그 때문에 알라키리는 창간 10개월 만에 짧은 기간이지만 발금 처분을 받았다. 그 후 1966년에 두 번째 발금 처분을 받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2. 3. 2. 샤를리 엡도 창간
1969년 2월, 『하라키리 에브도』(Hara-Kiri Hebdo)를 창간했으나, 1970년에 다시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70년 11월 9일 콜롱베-레-듀-에글리즈에서 샤를 드 골 프랑스 제18대 대통령이 사망하자, 11월 16일 자 제목을 "콜롱베에서 비극의 무도회 - 사망자 1명 (Bal tragique à Colombey - un mort)"으로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11월 1일 생 로랑 뒤 퐁(이제르주)의 디스코텍 '5-7'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프랑스어 위키백과)(사망자 146명)에 관한 신문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역사학자이자 『샤를리 엡도』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스테판 마쥐리에(Stéphane Mazurier)는 이 풍자 만화가 샤를 드 골을 조롱한 것은 아니었지만, 편집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으므로, 이 기회에 같은 멤버들과 새로운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한다.[7]
1970년 11월 23일, 『샤를리 엡도』가 탄생했다. 『하라키리』의 풍자 정신을 계승하면서 군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유럽의 반핵 운동의 발단이 된 뷔제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을 일으켰고, 동물 복지 운동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카바나는 『하라키리』에서 『샤를리 엡도』에 이르기까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모든 멤버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카바나에게 유머란 권력에 대항하는 것, 모든 어리석은 짓에 "얼굴에 어퍼컷을 날리는 것"이었다.[4] 그러나 1981년 5월 대통령 선거 및 6월 총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고, 1973년에 『샤를리 엡도』와 마찬가지로 좌파 신문으로 창간된 『리베라시옹』이 시대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샤를리 엡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었다.[8] 독자 이탈이 진행되었고, 광고를 일절 게재하지 않는 방침 때문에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1981년 말 파산 신청을 하고 12월 23일 최종호를 발행했다. 카바나는 2010년에 “이제는 『하라키리』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말하지만, 다른 모든 저널리스트와 아티스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저속하고 저급한 신문이라고 비난받고, 반역자, 떠벌이, 사회의 주변부로 몰린 인간들의 모임이라고 말해졌다”고 회상했다.[9] 그러나 후회도 향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활동의 지속이었고, 실제로 10년 후 필립 발(프랑스어 위키백과)이 같은 이름의 풍자 신문 『샤를리 엡도』를 창간했을 때, 그는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2. 3. 3. 샤를리 엡도 폐간과 재창간
1969년 2월, 프랑수아 카바나는 『하라키리 에브도』(Hara-Kiri Hebdo)를 창간했으나, 1970년에 다시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70년 11월 9일, 샤를 드 골 전 프랑스 대통령이 사망하자, 11월 16일자 신문 제목을 「콜롱베에서 비극의 무도회 - 사망자 1명」으로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11월 1일 생 로랑 뒤 퐁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사망자 146명)을 다룬 신문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었다.[7]
1970년 11월 23일, 카바나는 『샤를리 엡도』를 창간했다. 『샤를리 엡도』는 『하라키리』의 풍자 정신을 계승하여 군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지했다. 특히 뷔제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과 동물 복지 운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카바나는 『샤를리 엡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모든 멤버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4]
그러나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고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이 인기를 얻으면서, 『샤를리 엡도』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8] 독자 이탈과 광고를 싣지 않는 정책으로 인해 경영난에 빠져 1981년 말 파산 신청을 하고 12월 23일 최종호를 발행했다. 카바나는 『하라키리』가 성공을 거둔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다른 언론인과 예술가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회상했다.[9] 10년 후 필립 발(프랑스어 위키백과)이 같은 이름의 풍자 신문 『샤를리 엡도』를 창간했을 때, 카바나는 이에 참여했다.
2. 4. 작가 활동
1980년대 이후 집필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레 리탈(Les Ritals)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91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작가로서 최전선에서 활약하게 된 카바나를 유머리스트 피에르 드 프로주는 "현대의 라블레"라고 칭했다. "본능적인 좌파"임을 자처하는 그는 동물 복지, 투우 반대, 생태 운동 등의 운동에도 발족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 5. 말년
카바나는 2011년 1월에 발표한 자전 소설 《Lune de miel|밀월프랑스어》에서 "난잡한 여자"인 "미스 파킨슨"과 "매우 사랑하고 있다"고 밝히며, 파킨슨병을 앓고 있음을 공개했다.[10]
대퇴골 경부 골절과 호흡기 합병증이 겹쳐 2014년 1월 29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작품 목록
카바나는 소설, 수필, 역사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특히 《메로빙거 왕조》 시리즈는 아틸라 사후 갈리아와 프랑크 유럽의 역사를 다룬 역사 로맨스 소설이다. 또한, 《여행》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를 아일랜드 선원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 소설이다.
그는 《Li'l Abner|릴 앱너프랑스어》, 《Crasse-Tignasse|크라스-티냐스프랑스어》, 《Max et Moritz de Wilhelm Busch|빌헬름 부시의 막스와 모리츠프랑스어》, 《L'Univers impitoyable de Gary Larson|가리 라슨의 무자비한 우주프랑스어》, 《Je ne suis pas n'importe qui ! Jules Feiffer|나는 아무나 아니야! 줄스 파이퍼프랑스어》 등 다른 작가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3. 1. 출판물 (연대순)
3. 2. 번역
출판 연도 | 작품명 | 출판사 |
---|---|---|
1971 | Li'l Abner|릴 앱너프랑스어 | 에디시옹 뒤 스퀘어 |
1979 | Crasse-Tignasse|크라스-티냐스프랑스어 | 에콜 데 루아지르 |
1980 | Max et Moritz de Wilhelm Busch|빌헬름 부시의 막스와 모리츠프랑스어 | 에콜 데 루아지르 |
1988 | L'Univers impitoyable de Gary Larson|가리 라슨의 무자비한 우주프랑스어 | 프레스 드 라 시테 |
1989 | L'Univers impitoyable de Gary Larson contre-attaque|가리 라슨의 무자비한 우주: 반격프랑스어 | 프레스 드 라 시테 |
2007 | Je ne suis pas n'importe qui ! Jules Feiffer|나는 아무나 아니야! 줄스 파이퍼프랑스어 | 퓨투로폴리스 |
4. 유산 및 평가
프랑수아 카바나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풍자 언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가 창간한 알라키리와 샤를리 에브도는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다이즘 정신을 계승한 알라키리는 군국주의와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프랑스 언론계에 돌풍을 일으켰다.[4]
1960년대 당시 프랑스 사회는 미성년자 보호 법률 시행과 검열 강화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분위기였다.[6] 이러한 상황에서 알라키리는 발금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카바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샤를리 에브도를 창간하여 풍자 정신을 이어갔다.[7] 샤를리 에브도는 군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가치를 옹호했으며, 뷔제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프랑스와 유럽의 반핵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카바나에게 유머는 권력에 대항하고, 어리석음에 "얼굴에 어퍼컷을 날리는 것"과 같았다.[4] 그러나 1981년 사회당 집권 이후 샤를리 에브도는 시대적 흐름에 뒤처지며 독자 이탈과 경영난을 겪었고, 결국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다.[8] 카바나는 샤를리 에브도가 다른 언론인과 예술가들에게 미움받고 비난받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회상했다. 중요한 것은 활동의 지속이었고, 실제로 10년 후 필립 발이 샤를리 에브도를 재창간했을 때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9]
4. 1.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프랑수아 카바나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어린 시절 차별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자전적 소설 『Les Ritals』(레 리탈)에는 이러한 경험이 잘 나타나 있다.[4]4. 2. 평가 (추모의 말)
카바나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풍자 유머의 아버지이자 현대 풍자 언론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창간한 알라키리와 샤를리 에브도는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왈랑스키: 카바나는 알라키리에 자신의 그림을 게재해 준, 최고의 친구이자 진심으로 존경하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11]
윌렘: 카바나는 많은 풍자 만화가를 발굴하고 기회를 주었으며, 알라키리는 항상 축제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11]
카부: 카바나는 유머의 위대한 사제이자 알라키리 창간을 통해 미디어와 웃음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며, 위선을 깨뜨린 무서운 어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1960년대에 이미 30~40년 후의 일을 해낸 선구자였다.[11]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카바나는 자유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정치·사회 비판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한 작가이며, 알라키리 창간자로서 무례함과 도발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인물로 평가했다.[12]
장-마르크 에로 총리: 카바나는 20세기 후반 풍자 유머의 아버지이며, 알라키리와 샤를리 에브도 창간을 통해 민주적 논의를 활성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언어를 사랑하고 일상의 사건을 능숙하게 표현한 언어의 연금술사였다고 덧붙였다.[12]
프랑수아 바이유 민주운동(MoDem) 당수: 카바나는 저널리즘에 큰 변혁을 가져왔으며, 두려움을 모르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세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었고, 그의 덕분에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12]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 카바나는 전후 풍자 언론의 선구자였으며, 알라키리 창간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토록 자유로운 스타일에 놀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호기심 많고, 무례하며, 훌륭한 아이러니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2]
참조
[1]
웹사이트
La mort de François Cavanna, gardien de la mémoire des maçons italiens de l'Est parisien
http://www.lemoniteu[...]
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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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Cavanna
http://www.evene.fr/[...]
Evene France
2022-08-24
[3]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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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Cavanna, mort d'un « rital »
https://www.lemonde.[...]
2018-07-06
[5]
웹사이트
Cavanna {{!}} Charlie Hebdo
https://web.archive.[...]
2015-01-07
[6]
웹사이트
La presse et la loi de 1949, entre censure et autocensure - Société pour l’histoire des médias
http://www.histoired[...]
2018-07-06
[7]
뉴스
"Charlie Hebdo", canal historique
https://bibliobs.nou[...]
2018-07-06
[8]
뉴스
"Charlie Hebdo", 44 ans de rigolade
https://www.nouvelob[...]
2018-07-06
[9]
웹사이트
François Cavanna : « “Hara-Kiri” était haï à l'unanimité »
https://www.lemonde.[...]
2018-07-06
[10]
뉴스
EXTRAITS. Mr Cavanna et Miss Parkinson
https://bibliobs.nou[...]
2018-07-06
[11]
웹사이트
« Cavanna, l'anti-faux-cul par excellence »
https://www.lemonde.[...]
2018-07-07
[12]
뉴스
Cavanna, le maître de l'humour "bête et méchant", est mort
https://culturebox.f[...]
201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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